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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문산책]한국전쟁과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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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가족 회복하기

[역사인문산책]한국전쟁과 그 후

평화 통일을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기억

 


한국전쟁.jpg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flowerbud21/221574330505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1950112,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전 미국신문 기자협회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애치슨 라인으로 

정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된 한국,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 등은 국제연합의 보호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남침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이 미국의 보호에서 

제외되자 소련의 스탈린에게 지원의 약속을 받고 1950625일 새벽 

선전포고도 없이 전면적인 남침 강행을 시작합니다.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운 

우세한 전력으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남하했습니다


곧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지만 세계 2차대전을 마치고 군사력이 쇠약해진 

미군은 북한군에 6시간 만에 붕괴되는 충격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국군이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유엔군과 협동하여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역전의 기반을 마련했고 북한이 남한에 계획했던 상륙작전을 

막아내었던 것입니다

북한은 남침을 시작하면서 후방인 부산을 목표로 상륙작전을 펼쳤는데 만약 북한이 

성공하였다면 우리는 후방에서도 공격을 받아 북한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은 한반도 통일 직전까지 바라보게 

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다시 역전이 됩니다

북한의 패망이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본 중국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였고 악명 높은 인해전술을 펼칩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과 극한의 

추위까지 닥쳐오면서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에 집결하여 후퇴하게 됩니다.

 

이후 중공군과 북한군은 37도선에서 전선을 재정비한 국군, 유엔군과 다시 한번 

공방전을 펼치면서 이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유엔군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입니다


당시 한국정부는 휴전을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유엔군은 한국정부의 동의 없이 

1951710일 개성에서 첫 번째 휴전 회담을 가집니다

2년간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와 휴전선 문제를 다루며 1953727일 

한국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 후 남과 북의 상황

한국전쟁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61에 달하는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치게 되었는데요. 북한이 3백만, 남한이 2백만으로 한반도 전체가 피폐화 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기간 대규모의 인구이동으로 인해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합니다


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 되었고, 남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전쟁 후 남과 북의 이질화는 더욱 심화하였고 남한에서는 반공, 북한에서는 반미가 

모든 이념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남과 북의 정치체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북한은 전쟁과정에서 

김일성 자신의 1인 독재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동지이자 경쟁자들을 숙청합니다


당시 북한에는 4명을 중심으로 한 각 세력이 있었는데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

조선의용군 사령관 출신인무정의 연안파, 조선노동당을 건설한 엘리트허가이의 

소련파, 공산주의 핵심인물박헌영의 남로당파가 존재했습니다.

 

김일성은 이들을 차례로 숙청하면서 자신의 유일 지배체제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반면 남한에서는 반공을 무기로 한 이승만 장기집권체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남과 북은 서로 군사력 증강에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요

특히 북한은 미군, 한국군의 군사력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북한의 경제발전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전 10만 명 정도였던 남북한의 군대는 각기 전쟁이 끝날 무렵 60만 명 수준으로 

늘어납니다. 그 후 서로 휴전선을 두고 150만 명 이상의 정규군을 배치하며 군대는 

남북한 정권을 지탱하는 근간이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교훈

전쟁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어두운 면만을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쟁 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신적으로 단련이 되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국민들은 

어떤 역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의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은 한 세대 만에 

세계 10대 산업국가의 반열에 오르고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포함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매년 6.25를 기념하면서 우리는 선열들의 희생을 통해 평화는 바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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