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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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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스토리

대한독립의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

역사 인문 산책- 안중근 편

 
나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다
-대한독립의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명언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과거는 단순히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한번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5.jpg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코레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바로 가파른 역사의 강을 가로지르기 위한 정의로운 선택.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수괴 이토 히로부미는 현장에서 사살됐고 안중근 의사는 당당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개인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은 처음 3발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시켰습니다. 이어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1발, 비서관 모리타 이지로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 1발을 맞혔습니다.
그리고 불발탄 1발이 더 있었습니다. 마지막 불발탄 1발은 플랫폼에 떨어졌습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칩니다. “코레아 우라!” 이토히로부미 암살은 
암살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항일 투쟁을 알리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로 외친 것입니다. 
 
러시아를 누르고 세계 신흥 제국이 된 일본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처음에 많은 언론은 국제정세에 영향을 준 이토 히로부미를 조명했습니다.  
그러나 곧 일본에 맞서 항거한 안중근이라는 인물로 관심이 쏠렸습니다. 1907년 이후 해외에 망명한 많은 동포는 이를 계기로 독립을 위해 해외 모금 운동과 구명운동을 펼쳤습니다.
국내에서는 많은 이들이 안중근의 사진을 가슴 속에 품고 다니며 독립 의지를 불태울 정도였습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하얼빈 거사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국가적인 일이지 개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의 굳건한 태도와 정연한 논리는 일본인들조차 감동하게 해 적대관계를 넘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웠습니다. 하지만, 일제 재판부는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민족의 독립심을 위해 순국을 선택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으로 이송된 안중근. 그는 감옥 안에서도, 재판 과정에서도 거사의 정당성을 밝히며 시종일관 기개를 잃지 않았습니다.
5개월 수감생활 중 재판을 받으며 두 권의 저서도 남깁니다.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입니다. <동양평화론>은 다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형 직전까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 저술에 힘을 쏟았습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아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 의사에게 수의와 함께 보낸 편지에도 기백이 보입니다.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훌륭한 아들에게 전하는 위대한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는 조국을 위해 끝까지 목숨을 바치는 이유가 됐습니다.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감격스러운 광복의 순간을 맞이하고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마음을 가진 안중근과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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